강의석 포스트모더니즘 분석론.

주절거림 | 2009/02/18 00:47 | 네글자군

 

예전에 학내 종교 자유로써 한때 떠들썩 하게 해주었던 강의석이란 사람이 군대의 폐지 운동으로써 누드시위까지 하는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을 비판한다. 아니, 거의 꼴깝떤다라고 말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사실 누구도 강의석의 논리 앞에서 입만 벌어질 뿐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가 있으면 일단 '인정'은 한다는 사실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함 그 자체이다. ( 강의석은 어떤 논리든지 '부정'은 하지 않는다. 다시 '재비판'할 뿐이다. ) 이는 싸이월드 게시물중 하나(2009. 2. 17 현재 13번 항목 참조)로 설명이 되어진다.

13.악플에 대해?
우선은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냥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어떤 생각이든 사람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자유 존중한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이런 강의석에 대해 여러 감정적인 대응이 많으나, 가장 분석적으로 (즉, 체계적으로) 접근한 글이 있었으니 88만원의 세대 공저자 젱가님이 쓰신 글이다.

 

젱가님의 글을 극도로 단순화하자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먼저 강의석에 대한 두가지 시선, 즉 영악한 처세가와 포스트 모던한 주체로 나누어서 살펴본다. 그리고 결론으로써 이러한 시도는 '일반적인' 20대의 '인생'에 대해서는 무모한, 즉 성공가능성이 거의 없는 행위로 마무리 짓는다. 지금 글을 쓰는 나의 필력이 이 글을 완전히 요약시키기엔 부족함을 여김없이 느낀다.

 

어쨌든, 젱가님의 글을 읽고 누구나 한번쯤 들을 법한 생각이 있다. 바로 이 문단이다.

두 번째 시선은 강의석 씨를 '포스트모던한 주체'로 보는 것이다. 강의석 씨는 어렸을 때는 '세계평화'를 고민하다가 회의를 느끼고 '개인의 행복'을 찾게 됐다고 말한다. 이렇게 '세계평화'라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고민이 '개인의 행복'이라는 작은, 그러나 실존적인 고민으로 단번에 환치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포스트모던적'이라는 것이다. 즉, '세계평화'와 '개인의 행복'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 단계가 소거돼 있다. 아즈마 히로키가 일본사회 오타쿠의 특징으로 지적했던 증상이다.

과연 세계 평화라는 대단위의 개념과 개인의 행복이란 군소단위의 개념이 어떻게 환치되었냐는 의문이다. 물론 이를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라고 한다고 하여서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서술하면 좀더 깔끔하고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순환적인 정의는 논리적인 어폐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본인은 용감(?)하게도 - 무식하니깐 용감한 것이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몇가지 특성을 가지고 이 현상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도그마의 파괴로서 나타난다. 이는 모든 이성적 권위에 대한 불신의 극한이자, 실존으로 대표되던 철학들의 연장선 상에 놓여있다고 보아도 무관할 것이다(이는 실존주의적 사상의 시발점을 연관시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로 인해 새로운 권위의 상징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이성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결국은 모든 이성은 각자의 인식론속에서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결론을 가지게 된다. 더욱이, 이는 보상적인 측면도 있다. 헤겔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는 매순간 포스트 모더니즘이 가진 가장 아이러니한 반(反)이다. 이로 인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어쩔수 없이 도그마의 파괴라는 정(正)과 상대방 개인 혹은 사회의 인식론속 가치의 반(反)을 합쳐 자신만의 합(合)을 만들 수 밖에 없다. 합(合)의 정도에 따라 적당한 개인주의자, 혹은 사회 개혁론자, 사회 이탈자등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과연 세계 평화와 개인의 행복의 상관성을 묻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수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세계평화와 개인의 행복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접근을 해보자. 아, 그리고 세계평화의 전제 조건중 하나가 세력의 균형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선 역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과연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는 철저히 상대적인 관점의 행복일 것이다. 왜냐, 이는 아까전에도 말한 반(反)에 대한 개념으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각자의 이성에 대한 가치는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 '빵 한개'를 준다. 그렇다면 각각의 인식 속에서 '빵 한개'의 가치는 분명 다르게 느껴졌을 테지만(당장 그 개인들중 거지/부자가 없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그 이성으로 대표되는 인식은 같게 여겨진다. 이런 예를 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 행복이란 필연적 불평등을 이미 예고하고 추구되어진다. 이를 보았을때, 강의석이란 사람은 어느 순간에 와서 진정한 세상의 평등함은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서 불가능 하겠구나를 느꼈을 것이고, 평등함보다 더 상위 단계의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인 각각 개인단위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서 더 나부려볼(?)의도 많으나 괜한 현학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한가지 사족을 더 붙이자면 포스트 모더니즘 자체는 어짜피 개인 단위에서 분화되어 누구누구니즘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위의 합(合)이라는 개념에서 보았을때 말이다.)

 

이로써 본인 방식의 강의석 분석은 이렇게 끝을 맽는다. 이 글은 젱가님의 글이 옳다 틀리다, 내글이 더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또다른 분석 방식이라는 점을 여기서 밝혀둔다. 사실, 글의 유연성이나 읽기 좋은 부분과 기타 많은 부분에 있어선 젱가님을 못따라간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을 떠나서 일반 사실이다. 연륜, 지식, 지혜의 차도 있을 터인데, 이렇게 본의 아닌 '도전'은 (이 글은 젱가님에 대한 도전이 아닙니다 ^^;) 당연히 내가 지는 것이다.

 

이만, 생각해 것을 주신 젱가님께 감사함을 다시 표하며, 이번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틀린 부분이나 미숙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댓글로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L900 두께 비교.

삽질/기타 | 2009/02/12 08:38 | 네글자군
L900 소개 맥시안 사이트 : http://www.maxian.com/product/product_L900.asp

 

 

L900은 인강 수강용으로써는 적합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PMP이다. 그래서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PMP이기도 하다. 일단 그것은 그렇다 치고, 이것을 사서 친구들에게 보여주니 무슨 도시락 들고 다니냐고 한다. 쩝. 사실이다. 엄청난(!)두께의 압박은 시각적으로 매우 매우 부담이 되는 듯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L900의 두께를 물어본다. 그래서 필자는 직접 성X출판의 수학의 X석 10-나 가지고 직접 비교해 보기로 하였다. (이 포스팅은 L900s 가 아닌 L900을 기준으로 작성하였음)

 

케이스를 제외한 본체

본체만 해도 이정도이다. 자, 이제 케이스를 씌어 볼까나?

 

전면 케이스를 뒤로 제낀상태

와우. 디지털 카메라가 똑딱이라서 왜곡되 보인다고 생각하신다면 약간은 맞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거의 차이가 없다. 저 사진에서 (PMP의 두께가) 불과 2 ~ 3mm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앞 뚜껑만 뒤로 제낀경우. (똑딱이 자석은 제끼지 않음)

자 이제, 똑딱이 자석을 제외하고 앞면 커버만 뒤로 제끼어 본다. 두께만 따진다면 거의 성경책 수준이다. 앞면 커버를 뒤로 제끼고 PMP를 들고 다녀야할 경우가 많은 것으로 봐서는 두께가 디자인상의 심각한 결함(?) 수준이다.

 

똑딱이 자석까지 뒤쪽으로 제낀경우

이젠 커버를 씌우고 똑딱이 자석까지 뒤로 넘긴 상태이다. 물론 이런 상태로 들고 다닐 사람은 매우 적다. 그리고 들고 다니더라도 손가락으로 받쳐서 가리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크게 상관 없을듯 하다.

 

이상 L900 두께비교 실험을 모두 마쳤다. 분명 L900은 인강용으로는 거의 완벽한 수준의 PMP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디자인적으로는 많은 부분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듯 하다.

태그 : L900,PMP,두께

겨울.

포토로그 | 2009/01/25 13:42 | 네글자군

유난히 눈이 오는 날들이 눈에 띄이는 겨울이다. 다른 때보다 많이 혹은 적게 와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춥다. 그냥 춥다. 그때 거짓말 하지 말걸 그랬다. 그냥 질투가 났다. 쩝. 지금쯤 비웃고 있겠지 뭐... 당연한 일일것이다. 오히려 나에게 욕이라도 실컷 해준다면 더 좋을 걸.... 이런 상황은 너무 싫다. 그러나 당연한 일일 터이다. 내가 처음부터 잘못한거니깐.

 

아.. 이제 이 겨울도 끝나면 마녀같은 봄이 오겠지. 사실 만물의 생동감은 2월달 부터 오기 시작하는거랜다. 그것도 2월 초중순쯤에.

 

영어 공부만 하지 말고 수학도 해야할 텐데... 생각하지만 아깝지 않다. 공부? 때려쳐버려. 먹고 사는데 지장만 없음 된다. 사실 공부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수만가지다. 당장 다 때려치고 절에 들어가 행세 하며 먹고 살수도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 이제 좀 자야겠다. 너무 피곤한 겨울이다.

믹서에 관한.

포토로그 | 2009/01/25 12:39 | 네글자군

문과로 진로를 정한 지금도, 믹서나 기타 등등 엔지니어적인 장비를 보거나 다룰때면 가슴이 설레어(?) 올때가 있다. 아무래도 나는 타고난 이과체질인듯 하다. 그러나 왜 문과를 갔느냐? 비겁한 도피라고 하면 너무 비굴하므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좀더 색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서 라고 대답을 하겠다.

 

믹서를 다루다 보면 상당히 많은 버튼들과 연결선을 마주하게 된다. PFL/AFL버튼, 페이더, 캐논 연결선, 폰 연결선, aux, 게인, 기타 등등. 하여튼 무수한 것들이 있는 듯 하다. 밸런스 연결, 언밸런스 연결 등 믹서에 연결하고 소리를 전달하는 연결 방식에도 종류가 있다.

 

믹서를 다루다 생각한 것인데, 사람도 믹싱해 보면 어떨까? 여러 가지 소리를 합해서 하나의 음악이 되듯, 여러 사람들을 종합해 보면 무언가 예술에 이르르는 엄청난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혹은, 각자의 특출한 부분만 서로 삐져나와서 불협화음에 이르지 않을까?

 

그저 잡생각일 뿐이다.

연산자의 prefix, postfix

삽질/컴퓨터 | 2009/01/22 11:42 | 네글자군

오늘 이 포스팅에선 prefix(전위표기), postfix(후위표기) 방식의 연산방식을 소개해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10 + 12 = 22 와 같이 쓰는 표기는 infix(중위표기)라 한다.

 

Prefix
연산자(Operator)를 연산을 시행하고자 하는 두 숫자 앞에 적는 방식이다.
예) + 10 12 = 22 -> 10 + 12 = 22
     - * / c - a b d * e - f c         -> c / (a - b) * d - e * ( f - c )

 

Postfix
연산자(Operator)를 연산을 시행하고자 하는 두 숫자 뒤에 적는 방식이다.
예) 10 12 + = 22 -> 10 + 12 = 22
     c a b - / d * e f c - * -         -> c / (a - b) * d - e * ( f - c )

c / (a - b) * d - e * ( f - c ) 클릭해서 보세요.


위 그림을 보면서 뭔가 삘이 꽂힌다면 당신은 이미 센스쟁이. 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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